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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걸리, 그에게는 광기가 없다

안창현 | 기사입력 2023/11/23 [10:02]

막걸리, 그에게는 광기가 없다

안창현 | 입력 : 2023/11/23 [10:02]

 

▲ 작가 이성숙


사람과 여행을 사랑한다.


2015년 <기독문학>으로 등단. 산문집 <고인 물도 일렁인다>, <보라와 탱고를>, <인식의 깊이, 삶의 너비> 공저집 <길 위에 길을 내다>


한국산문 작가회원, 문예바다 작가회원.    

 술맛이란 깊은 경지의 예술만큼이나 오묘하고 간단치 않다. 누구와 마시는지에 따라 다른 맛을 내고, 오전과 오후에 다른 맛을 내며, 마시는 사람의 컨디션에 따라서도 다른 맛을 낸다. 막걸리도 예외가 아니다. 막걸리는 특히 누룩의 상태에 따라 다른 맛을 내지만 그것으로 막걸리의 깊이를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막걸리 맛을 결정하는 변수는 실로 다양하다. 막걸리는 술 빚는 날의 기온, 계절에 따라 다른 맛을 내며, 발효 시간, 물양, 발효 온도에 따라 다른 맛을 낸다. 그에 따라 단맛과 떫은맛, 신맛과 쓴맛의 정도는 모두 다르다. 손마다 다른 맛을 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거 우리나라에서는 집마다 막걸리를 빚었다. 이런 조건의 다양함으로 인해 당연히 막걸리 맛은 집마다 달랐다. 주인의 성격에 따라서도 그 맛은 달라졌으리라.

 

 나이가 중년에 다다르니 막걸리가 좋다. 사람을 이래라저래라 간섭하지 않아서 좋고, 곡기라 그런지 빈속에 마셔도 편안해서 좋다. 포도주나 위스키를 마실 때처럼 격식을 강요받지 않아서 좋고, 독하지 않아 안주 타령을 굳이 할 필요가 없으니 좋다. 주머니가 빈약해도 손을 청할 수 있으니 그 또한 좋다.

 

 구름 든 하늘 아래서 막걸리와 독대한다. 그늘이 깊으면 향이 진한 법. 막 걸러낸 막걸리 향이 공기에 묻어난다. 술이 약하다 하는 사람 중에는 막걸리를 조용히 가라앉힌 후 위로 뜨는 맑은 액만 마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막걸리를 마시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특히 집에서 거른 막걸리도 아니고 시판되는 것이라면 위의 맑은 부분은 당분과 탄산일 뿐이다. 맑은 액체만 마신다면 과도하게 첨가된 탄산과 감미료로 입맛을 상할 뿐 아니라 막걸리 덕을 온전히 누리지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막걸리는 쌀 발효주다. 맛이 담백할 뿐 아니라 단백질과 젖산균이 풍부하여 소화를 돕고 숙변을

유도한다. 성인병 예방과 더불어 항암효과도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텁텁한 막걸리 지게미 때문이다. 가능하면 체온이 덜 전달되도록 하여 흔들어 주는 게 좋다. 집에서라면 이중 처리된 용기에 담으면 좋겠다. 그런 다음 잔에 따른다.

 

 흔들어 놓은 막걸리에 아직 살아 있던 기포가 봄이슬처럼 터진다. 가라앉은 지게미를 일으키기

 위해 거문고를 켜듯 섬세하게 다시 한번 도가니 바닥을 젓는다. 유려한 가락이 잔 위에 물결을 만

▲ 술독에서 익어가는 막걸리    

든다. 이 느림과 여유, 천연덕스러운 걸쭉함이 막걸리의 핵이다. 일찍 걸러낸 술은 아직 탄산감이 들지 않았다. 덜 유혹적이라 할까. 대신 간질이듯 한 단맛과 원시림처럼 깨어나지 않은 뒷맛이 깊고 수굿하다. 나는 독주가 되기 전, 이즈음의 막걸리를 좋아한다. 세상 뭐 그리 독하게 살 필요가 있는가. 발이 성긴 천으로 걸러낸 술이라 지게미도 두툼하다. 숭늉 같은 구수함과 독하지 않은 발효 향, 세련되지 못하게 걸러진 양태. 그런데도, 제법 술맛이다.

 

 막걸리를 대할 때는 온갖 치장을 걷어내고 마음속에 빈 곳 하나 남겨 두기 권한다. 빈 곳으로 인생이 흘러들 테니. 막걸리를 앞에 두면, 겁먹은 사람 속에서 의연하기, 경제가 망가지는 상황에서 그것을 바라보기, 뭔가를 해야 한다고 뛰어다니는 사람 속에서 침잠하기, 이런 것들이 가능해진다. 그에게는 광기가 없다. 실연도 중독된 사랑도, 어디론가 숨어버린 로맨스의 기억도 막걸리 한 잔이면 우리는 관대할 수 있다. 서정시 같은 술이다, 막걸리는.

 

 포도주 마시기는 까다롭기가 조선시대 법도(法度) 같다. 잔을 고르고 쥐는 모양에도 예법을 따진다. 이 예법이란 것이 과거 유럽 귀족들이 자신을 특권화하느라 만들어 낸 규칙이건만 현재까지 살아남아 사람을 귀찮게 한다. 포도주를 폄하할 의도가 아니라 막걸리만큼 사람을 편하게 하는 술이 없다는 뜻이다. 태생이 순한 막걸리는 어떤 자세로 마셔도 제맛과 멋을 잃지 않는다. 게다가 집에서 손수 걸러낸 막걸리는 아무리 마셔도 후유증이 없어 맘껏 취기를 느껴도 몸이 망가지지 않는다. 독자적이나 오만하지 않고 편안하나 나태하지 않은 성질, 그것이 막걸리의 격조다. 희로애락을 겪어 낸 말년의 인생처럼 막걸리는 순한 결을 가진 술이다.

 

 막걸리는 거른 후 바로 마실 때가 최적이다. 나흘 전 담가 둔 술 도가니를 연다. 처녀 주다. 혼자 마신 술이 중자 배기 서너 사발은 되리라. 집안 내력으로 술이 약한 나인데도 막걸리를 폭음하고 숙면에 든다. 다음 날까지 몸이 가볍고 개운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막걸리 뜨는 날, 그대도 오라.

 

 마름 주를 조금 남겨 두고 술독을 다 비웠다. 이 마름 주는 다음 술을 빚을 때 섞어 쓸 요량이다. 누가 아는가, 이 작업이 백 년 탁주 가의 시작이 될지. (계간 현대수필 2022 봄호)

 

                                                            <본 작품 게재는 저자의 동의를 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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