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영수 회담이 끝나고 한동안 비선 논쟁이 시끄러웠다. 공식 참모 라인이 아닌 이른바 비공식 라인이 특사 역할을 맡아 물밑 조율을 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비선(秘線)이란 비공식적인 관계를 통해 업무를 처리하면서 그것이 조직사회에서 용인되지 않는 경우를 일컫는다. 우리나라에선 1980년대부터 쓰였던 단어로 추정된다.
전두환 정권 시절 ‘비선 실세’는 아마도 동생인 전경환 씨를 꼽을 것 같다. 당시에는 이른바 3허 씨나 장세동 씨 등과 같은 실세가 있었지만 ‘리틀 전’이라 불린 전경환 씨의 권세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평가다. 이런 전경환 씨도 6공화국 출범 이후 새마을운동 자금을 횡령한 사실이 밝혀져 실형을 살았다.
노태우 정권 시절엔 영부인의 사촌 동생인 박철언 씨가 비선 실세로 꼽힌다. ‘제6공화국의 황태자’라 불린 그는 정권 창출의 일등 공신으로 권력의 중심에 섰지만, 슬롯머신 업자에게 6억 원을 받은 혐의로 1993년 구속되어 실형을 살았다. 당시에 박철언 씨를 구속 수사한 사람이 지금의 대구시장인 홍준표 검사였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소통령’이라 불린 차남 김현철 씨를 꼽을 수 있다. 비록 공식 직함은 없었으나, ‘청와대 소통령’으로 불리며 실권을 휘둘렀다. 1997년 한보 사태 당시 몸통으로 지목되어 수사 대상에 올랐고, YTN 사장 인선에 개입하는 등 각종 비자금 혐의에 연루되어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밖에도 우리나라 역대 정권에는 늘 ‘비선’이라는 말이 나왔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에는 아들 3형제인 ‘홍삼 트리오’가,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는 ‘봉하대군’으로 불린 대통령의 형 노건평 씨가, 이명박 대통령 시절에는 ‘상왕’으로 불리며 '만사형통'이란 말의 주인공이 된 이상득 씨를 꼽을 수 있다. 모두가 한때 영어의 몸이 됐다.
비선조직이 강해지면 권한과 책임의 한계가 불분명해진다. 책임을 져야 할 관리의 권한이 없어지고, 책임 범위가 낮은 단계의 실세들이 권한을 행사한다. 직무 계통이 붕괴하는 것이다.
한비자(韓非子)의 ‘오두편’에 다음과 같은 말이 나온다.
“명군이 다스리는 나라는 책이 소용없다. 법 그 자체가 가르침이 된다. (중략) 학자들은 인의를 빙자하고 차림과 말을 그럴듯하게 꾸미고 현재 행해지고 있는 법에 대해 이의를 들고나와 임금의 마음을 어지럽힌다,”
국민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하운재(河雲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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